음반.


 음반을 사 모은 일이 있다. 10대 후반 일본음악 CD를 모을 때였는데 음원을 위해서라기보다 좋아하는 가수의 앨범이나 한정판을 모은다는 생각, 혹은 한푼 보태준다는 생각으로 용돈을 쪼개 열장 내외의 음반을 샀던 기억이 있다.

  편도 1시간 반 정도 걸리는 긴 출근시간에 항상 음악을 듣는다. 평소 좋았던 곡, 우연히 들은 곡 등을 낱개로 모아 가지고 있는데 마음에 드는 곡은 오랫동안 지우지 않고 계속 듣는다. 옛날부터 음원은 mp3로 다운받아서 들었다. 멜론에서 사기도 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익숙한 일일 것이다.
 그러다 mp3p를 졸업하고 아이폰을 갖게 된 후로는 한걸음 더 나아가 앨범 재킷 이미지를 고화질로 일일히 찾아서 다운받아 손 안에 진열하고, '사운드하운드'라는 어플리케이션을 이용해 어느 매장이나 길거리의 쇼윈도 앞에서 듣는 노래들도 왠만큼 수집할 수 있게 되어 1년 정도 돌아다니며 목록을 땄다. 좋은 곡을 발견해서 사운드하운드로 찾아 저장해 놓으면 꼭 보물이라도 찾아 다니는 소리도둑같은 느낌도 들고 해서 아주 즐거웠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어느 날 업데이트를 하고 나서 확인해보니 이 목록이 싹 없어진 것을 발견했다. 원인도 모르고 방법도 모른 채로 남자친구 차 안에서 벌컥 화를 냈다. 우연히 마주쳤던 곡들을 저장해 둔 목록이라 다시 찾을 길도 없었으니 더 화가 났던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보물처럼 찾아 가지고 있던 곡들을 떠나보내고 한동안은 체념한 채로 그냥 있었다. 떠올릴 때마다 울컥울컥 하면서.

 얼마 전 설 연휴를 맞아 늘상 오가던 홍대로 놀러 나왔다. 늘 보는 거리와 가게들. 내가 좋아하는 회전초밥을 먹으러 가는 길, 1층에 크라제 버거가 있는 커피빈 건물 앞의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멈춰 섰다. 늘 이 앞에서는 큰 음악소리가 들린다. 맞은 편에 서 있는 노란 간판의 '레코드포럼'이라는 음반가게에서 틀어놓는 음악소리. 이 소린 홍대를 드나들던 20대를 다 지날동안 내내 들어왔다. 매년 봄 여름 가을 겨울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휴가때도 크리스마스때도. 어딘가에 항의라도 하듯 왁왁거리며 온 홍대에 울려퍼진다. 난 지금 나오는 노래를 사야겠다며 남자친구와 가게 안으로 들어가 낼름 3만 얼마 했던 CD를 사 버렸다.

 밤에 집에 와서 아이튠즈에 넣어 놓고는 돌려보았다. 물론 버튼을 눌러 CD를 트레이에 얹고 밀어넣어 재생버튼을 눌러 듣는 재생이 아닌(이것은 내가 생각하기에 CD의 장점이다) 아이폰의 유리액정 위에 터치 한번으로 끝나는 재생이었지만. 3만원이나 하는 이 앨범을 CD로 산 게 잘한 짓인지 못한 짓인지 여전히 난 어리둥절하다.


감정의 조각.


 마음이 아플 때 쓴 글이 있다. 가만히 있는 것을 견딜 수 없어 스스로 쓴 글이기는 하지만, 이제와 다시 보니 아무렇지 않다가도 다시 그 때의 마음이 되살아나 아프게 찌른다. 그마만큼 싸우고 비난하는 것은 커다란 일인 것이다. 깊은 관계일수록 친하면 친할수록 상처는 더 커다랗게 남는다.
 시간이 지나면 잊혀진다. 사건은 잊혀지고 상처는 아물지만 그 때 느꼈던 감정의 작은 조각들은 느낌 그 자체로 살아 있어 기억을 더듬다가 이 감정의 조각들을 만지게 되면 소스라치게 놀라며 어렴풋이 그 황망한 감정들을 느끼곤 한다.


거의 다.

 이젠 거의 다 왔다. 서로 참을성이, 감정이 바닥 나 간다.
저번에 던져 깨뜨린 그릇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었어. 모든 게 온데간데 없고 전화로 싸우며 우악스럽게 소리지르던 목소리들만 인상에 남았다.

낚시


 여름 밤 한강. 일명 자전거다리라는 망원동의 야트막하고 작은 다리 위에서 건너편의 커다랗고 네모난 기둥 사이를 노려보고 있다. 등 뒤로 넘긴 낚싯대를 휘둘러 아까 보던 기둥 사이에 바늘을 던짐과 동시에 별안간 파다다닥 낚싯대로 느낌이 전해져 오고 줄이 팽팽히 당겨져 이리저리 움직인다. 씨름을 하고 있는데 멀리서 보고 있던 남자친구가 달려와 대신 건져준다. 무사히 뭍으로 나온 배스는 내 발만한 크기였다. 루어용 로드를 사서 처음 낚은 물고기다. 낚시는 정말 멋져.

 언제였던가, 여름에 친구들이랑 안면도에 1박 2일로 놀러가 쌩뚱맞게 낚시를 한 적이 있었다. 할일없이 뒹굴다가 왠지 다들 마음이 맞아 차를 타고 시내에 잠깐 나가 4000원짜리 싸구려 1회용 낚싯대와 하얗고 납작한 플라스틱통에 든 갯지렁이를 사서 펜션 앞으로 돌아왔다. 우리가 자주 놀러가던 펜션 앞에 길게 뻗어있던 방파제에 엎드려 다루기 힘든 바늘에 벌벌 떨며 갯지렁이 꼬매기를 결국 포기하고 남자친구 및 오빠들에게 넘겨 얌체처럼 편하게 낚시질만 했다. 역시 벌벌 떨며 가장자리에 간신히 몸만 걸친 채로 엎드려서.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낚싯바늘을 물에 넣기가 무섭게 줄줄이 딸려 올라오는 망둥이들. 정말 넣자마자 바쁘게 올라와서 남자친구와 오빠들이 더 이상 갯지렁이 끼워주기를 거부하는 이 시점에 애써 끼운 미끼가 없어져버리기 때문에 슬펐다.
 잡힌 물고기는 언니들이 손질해 수제비를 뜯어넣은 매운탕을 끓였는데 아쉽게도 고기와 대하구이에 밀려 많이 먹을 수 없었다. 낚시에 대한 내 첫 기억은 그렇게 남아 있다.

 파란 잔디밭과 조용히 흐르는 물. 한강의 여름밤을 즐기기에 낚시는 참 안성맞춤인 것 같다.



30세.


 내 또래들에게(특히 여자) 가장 두려운 숫자인 것 같다. 세상이 끝나는 것도 아니고,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왜이리 서른서른 하는가.

 남자친구는 나보다 한살이 많으므로 먼저 서른을 맞는다. 이미 지지난해는 같은 그룹의 독설언니들이 서른을 맞으며 주위 사람들에게도 적잖은 파장(?)을 주었었다. 파장일지 아닐지 모르나 어쨌든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서른이란 도대체 무엇이길래 저렇게 앓이를 하나 궁금하게 했으니까. 남자친구도 물론 입버릇처럼 '좀있으면 서른이네' 하며 탄식하곤 한다. 본인이 특별히 상관이 없어도 동갑내기들이 하도 호들갑이니 누구라도 그럴만 한 것도 같다.

 나는.. 이제 12월이 지나면 아직 1년이라는 시간이 남아있다. 그러나 사무실에서 일을 하거나 친한 손윗사람들을 만나며 항상 내 자신이 이미 몇 년 전부터 서른이라고 생각을 했다. 동갑내기와 접할 기회도 드물고. 가끔 생년월일을 세다가 '아 맞아 나 스물여덟이지' 한다. 그리고 지난 20대의 세월들이 아깝지도 않다.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 중 해낸 것도 많고 지금의 나도 만족스럽다. 후회스럽지 않다. 망나니 같은 짓도 진짜진짜 많이 했지만 지금의 내가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었을 것이라. 특히 대부분의 추억을 지금의 남자친구와 공유하고 있고, 이 사실이 정말 기쁘다.


당신이 사는 집 문 앞에 당도한 스스로를 
거울로 들여다보며 당신을 반길 때
시간은 한껏 들뜬 마음으로 찾아 올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를 반기는 미소를 머금으며 

여기 앉아요, 좀 드세요. 라고 말하겠죠 
당신 자신이었던 낯선 이방인을 당신은 
다시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빵과 포도주를 대접하세요
평생 당신을 사랑한 이방인에게 
당신의 마음을 되돌려주세요 

당신이 다른 이를 사랑하느라 모른 체 했어도 
그는 당신을 속속들이 알고 있습니다 
책꽂이에 간직했던 사랑의 편지들과 

사진과 절박한 심경이 담긴 쪽지들은 치워버리고,
거울에 담긴 당신 자신의 이미지를 벗어던지세요 
가만히 앉아서, 이젠 당신의 인생을 마음껏 음미하세요

-데릭 월콧, 사랑 이후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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